- 반도체 호황·사상 최대 흑자에도 환율은 고공행진

[코리아위크] 반도체 슈퍼사이클과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에도 불구하고 한국 원화와 대만달러, 일본 엔화는 좀처럼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통화 강세 요인으로 여겨졌던 수출 호조가 더 이상 환율을 지지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무역수지보다 해외투자와 대규모 대미 자금 집행이 환율 흐름을 좌우하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수출·성장률 ‘역대급’…환율은 정반대
대만은 글로벌 반도체 수요 확대에 힘입어 지난해 8%대 성장률을 기록했다. 수출은 30% 이상 증가했고, 경상수지 흑자 규모도 빠르게 확대됐다. 순수출이 경제 성장의 대부분을 설명할 정도로 수출 기여도가 높았다.
하지만 환율은 반대로 움직였다. 대만달러는 달러 대비 6% 이상 약세를 보이며 아시아 주요 통화 중에서도 부진한 흐름을 나타냈다. 한국 원화와 일본 엔화 역시 비슷한 방향성을 보였다.
한국의 경우 지난해 수출이 사상 처음 7000억달러를 돌파했고, 반도체 수출은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경상수지 흑자 역시 1200억달러를 넘어섰다. 그럼에도 원·달러 환율은 1480원대를 웃돌며 원화 약세가 이어지고 있다.
일본도 해외 투자 수익과 전자부품 수출 증가에 힘입어 경상수지 흑자가 사상 최대 수준으로 늘었지만, 엔화 가치는 구조적인 약세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저금리·고령화가 부른 해외자산 확대
세 나라 통화가 비슷한 궤적을 그리는 배경에는 ‘자본 유출’이 있다. 대만은 저금리 환경과 고령화로 축적된 자금이 국내 금융시장에 머물지 못하고 해외로 빠져나가는 구조다. 특히 생명보험사를 중심으로 해외 채권과 주식 투자 비중이 크게 늘었다.
최근 들어서는 해외 증권 투자 규모가 더욱 확대되며 순유출 압력이 커졌다. 외국인의 대만 주식 투자도 둔화되면서 들어오는 자금보다 나가는 자금이 많은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 역시 개인과 기관의 해외투자가 빠르게 늘고 있다. 이른바 ‘서학개미’의 해외주식 투자와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가의 글로벌 자산 배분 확대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해외투자 규모는 경상수지 흑자와 맞먹는 수준까지 증가했다. 흑자로 벌어들인 달러가 다시 해외로 나가면서 환율에 상방 압력을 주는 구조다.
일본 또한 장기간의 저금리 정책 속에서 해외 채권·주식 투자 비중이 높다. 해외 투자 수익이 경상수지 흑자를 키우는 동시에 엔화 수요를 약화시키는 역설적인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대미투자 확대…달러 수요 상시화
최근에는 대미 직접투자 확대도 환율 변수로 부상했다. 대만은 대규모 미국 투자 계획을 추진 중이며, 연간 집행 규모만으로도 기존 해외직접투자 평균을 웃도는 수준이다. 이는 지속적인 달러 수요로 연결된다.
한국과 일본 역시 미국과의 통상 관계 강화를 위해 수천억달러 규모의 투자 계획을 제시한 바 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지정학적 리스크 대응 차원에서 이뤄지는 전략적 투자지만, 단기적으로는 자본 유출 압력으로 작용한다는 평가다.
“약세 동조화, 일시적 현상 아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통화 흐름이 단순한 경기 순환이 아니라 구조적 변화에 가깝다고 진단한다. 과거처럼 무역수지 개선이 곧 통화 강세로 이어지는 공식이 약해졌고, 글로벌 자본 이동이 환율을 결정하는 핵심 변수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수출 호조에도 통화가 강해지지 않는 현상은 자산시장 개방도 확대, 고령화에 따른 자산 축적, 연기금·보험사의 해외 분산 투자 등 구조적 요인이 겹친 결과라는 분석이다.
결국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이어지더라도, 해외투자 확대와 대미 자금 집행이 지속되는 한 원화·대만달러·엔화의 약세 동조 흐름은 쉽게 꺾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온다.
